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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고은 천상병 김수영 신경림…. 작은 연구실 벽면을 따라 빽빽이 들어찬 한국문학 서적들이 그간의 수고로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백발성성한 벽안의 노교수는 한글로 된 책에 코를 파묻고 있다가 반갑게 기자를 맞는다. ‘한국문학의 해외전도사’로 불리는 안선재(66?Brother Anthony) 서강대 명예교수, 그는 한국문학 번역세계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탁월한 언어감각과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안 교수는 지난 18년간 자신의 전문인 고은의 시를 비롯해 23여권에 이르는 우리 시와 소설을 번역했다. 지난 18일 문화훈장까지 받은 안 교수의 연구실은 향냄새와 차향기가 그윽하다. 영국 출신인 안 교수는 교수이자 가톨릭 사제다. 옥스퍼드대에서 중세유럽문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에 유학을 갔다가 테제(Taize) 공동체에 반해 사제의 길을 걸었다. 1980년 한국에 온 그는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해 퇴임했다. “퇴임하면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면서 그는 “훈장받으러 갔다가 욘사마 배용준을 만났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는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한국문학의 맛을 살리는 데 정평이 나 있다. 김광규의 시 ‘효자동 친구’를 번역하면서 제목을 ‘A Good Son’이라고 옮겨 ‘효자동의 한자(漢字)의미와 시 내용의 반어적 이미지를 일치시킨 재치있는 번역’이라는 평을 받았다. 안 교수는 김광규 시집 번역으로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상을 수상했고 1995년엔 이문열의 소설 ‘시인(The Poet)’ 영역판으로 대산문학상 번역상을 받았다. 1997년 그가 번역한 고은의 선시(禪詩) ‘뭐냐’(What)를 읽은 미국 비트세대의 대표적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미국 시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작품”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94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그가 반평생을 바친 번역, 한국문학, 한국에 대해 한국어로 나직나직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에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느껴졌다. ▶서강대 재직 시절 김영무 시인 권유로 고은 시 번역 시작 =문학 장르 중에서도 특히 시(詩) 번역을 많이 하셨지요. 함축적 언어의 결정체인 시를 외국어로 이해하고 번역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끔 어려울 때도 있지만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재미없으면 왜 하나? 내가 문학을 공부했으니 한국문학을 좀 알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돌아가신 김영무(서울대) 교수가 고은 시인의 시를 추천해 줬어요. 읽어 보니 재미도 있고 그리 어렵지도 않더라고. 난 외국인이니 그냥 보면 잘 모르니까 찬찬히 뜯어보면서 번역을 했지. 놀아줘야 할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시간도 많고.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교수님이 번역하신 천상병 시인의 ‘귀천’ 중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란 표현이 있잖아요. 그 부분을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라고 하셨던데 아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그 부분은 나도 잘 됐다고 생각해요. 아마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라면 쉽진 않겠죠. 그런 점에서 난 draft(초벌번역)는 외국인이 해야 한다고 봐요. 가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영어 좀 읽을 줄 알면 일단 대충 번역해서 놓고 나중에 외국인이 봐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안 돼요. 일단 번역을 잘못해 놓으면 다시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벽한 번역을 해야 하거든. 그 다음 원본과 대조해 번역이 잘 됐나 봐주는 것이 한국 사람의 몫이죠.” =그렇다면 한 작품을 번역하는데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하겠네요? “최소한 두 사람이지. 초벌번역은 외국인이 맡아야 해요. 그 대신 외국인들은 어떤 작품을 번역해야 좋은지 고르는 눈이 없으니까 작품을 잘 살펴 가려주는 것이 한국사람 몫이고.” =완벽한 이중언어 구사자는 없을까요? “그런 사람은 있을 수가 없어요. 두 가지 이상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에도 보통 모국어 하나에 더 강점을 보일 수밖에 없거든. 아니면 둘 다 어설프게 하거나. 그러니 문학작품 하나 완벽하게 번역하려면 한국인과 외국인의 협동과정이 필요한 거죠.” =외국인이 한국문학 번역을 맡아야 한다면 번역가 찾아내는 게 제한적이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재미교포들 중심으로 실력 있는 젊은 번역가가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물론 한국에 대해 관심 갖고 공부하는 서양 사람들도 있고. 한국문학은 번역가가 없어서 문제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거짓말이에요. 지난 8년 동안 영미권에서 번역된 한국문학작품이 100여권이에요. 헝가리나 그리스는 5~6권. 그래도 그 나라에선 노벨 문학상 나오잖아요.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 한국 출판사들은 번역할 때도 ‘빨리빨리’ 외치니까 번역이 엉터리가 많아요. 문학번역은 특히 해당 언어의 역사, 문화를 잘 이해하는 긴 작업이고 가독성(readibility)과 정확성(accuracy) 어느 한쪽도 버려선 안 되죠.” ▶한국작가들 세계독자 배려해줘야 =한국어 번역이 더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표현 자체에도 존댓말, 반말 등 다른 나라엔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렇지. 천상병 시인이 ‘문디 가시나야’라고 쓴 걸 어떻게 번역할 거야. ‘이 자식아’는 ‘bastard’? 아니지. 딱 맞지가 않죠. ‘아줌마’ 같은 단어도 그렇고. 이게 번역계의 고민 중 하나예요. ‘현지화’냐 ‘고유화’냐. 가령 일본작품이 미국에서 출판될 경우 현지 스타일 에디터가 문체며 길이며 미국 입맛에 맞게 편집해요. 그러면 미국 판매량에는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일본 사람이 보면 ‘일본식 내러티브가 아니다’란 말이 대번에 나오죠. 톨스토이 작품이 19세기 영국에 처음 소개됐을 때 인기가 좋았는데 막상 러시아 사람들은 그 번역본을 읽고 ‘이건 톨스토이답지 않다. 너무 쇼킹하다’는 반응을 보였지.” =교수님은 번역하실 때 어떤 쪽을 먼저 생각하시나요? “정답은 없지. 천 시인의 ‘문디 가시나’는 그냥 소리나는 대로 적고 설명을 붙였어. 도저히 그 느낌을 살릴 만한 영어단어가 없더라고. 아줌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킬로미터를 마일로 바꾸는 것조차 안 된다고 해. 번역가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죠. 다만 작가들이 세계독자들을 고려해서 써 줄 필요는 있어요. 한국 독자들은 된장국이란 단어만 봐도 맛이 느껴지지만 외국 독자들은 전혀 낯설거든. 설명이 없다면 한국 독자들만큼 몰입하기가 힘들죠. 그 맛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줘야 해요.” =요즘 젊은 작가들은 워낙 국제화된 세대여서 소재는 외국인들에게 낯설 것 같지 않은데요? “물론 영어도 잘하고 여행도 많이 가서 웬만한 서양문화는 다 섭렵했죠. 하지만 문제는 깊이에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긴 하지만 깊이가 없어요. 박완서, 박영미, 신경림, 마종기 등 옛 작가들은 일제시대, 6?25 겪으며 고통의 체험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작품에 담을 수 있었죠.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살기가 어렵지 않으니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어요. 문장은 화려하지만 내용은 없는 거죠. 그런 작품의 경우 번역해 놓으면 읽을 게 없어요. 영미 문학뿐 아니라 인도, 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의 문학을 많이 봐야 해요. 영미 권 유명출판사들은 아주 대중적이거나 아주 고급 문학만 출판하려고 하죠. 그들이 볼 때 한국문학은 아직 세계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에요. 슬프지만 우리 그거 알아야 해요.” =교수님이 아끼는 한국문학은 어떤 작품인가요? “좋은 거 많죠. 번역하기 전엔 내용을 알 수 없으니까 기대를 가지고 번역하는데 소설은 신경림 것. 그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체험이 녹아 있으니까. 김광규 작품에는 유머가 있어 좋아요. 한국작가들이 오랫동안 유머 없이 살아오다 보니 작품에서도 그게 좀 부족해요. 고은의 시 작품은 강가를 걷고 자연을 노래한 내용이라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함께 공감할 수 있죠. 한국 사람들은 서정주 시인을 참 좋아하는데 외국인이 볼 땐 삶의 보편성 없이 언어유희만 있어서 공감하기가 어려워요. 한국문학의 힘은 삶의 고통을 통해 인간성을 추구하는 점이에요.” ▶고난 속 은총 깨닫는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 =외국인이 보는 한국문학의 표현적 특징이 궁금해요. 이를 테면, 미국의 소설은 문장이 짧고 간결하고 여러 등장인물의 다양한 시각을 그려내는 작품이 많잖아요. “한국소설은 대부분 ‘I(나)’ 위주로 풀어가요. 그렇다고 개인의 내밀한 심리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죠. 문제는 학교교육에 있는 것 같아요. 유치원 때부터 ‘네 생각은 어떠니?’ 하는 질문이 없어요. 글쓰기는 자기 논리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니 당연히 쓰기 능력이 약할 수밖에요. 매일 외우는 것만 하고 고전은 읽지 않아요. 영국은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셰익스피어 등 17세기 작품들이 지금도 널리 읽히잖아요. 지금 17세기 고전소설 찾아보기 어렵죠.” =그런데도 요즘 교육은 창의력 기르는 것과는 방향이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영어몰입교육’이라고 해서 초등학교 교육부터 영어가 강조되잖아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난 도대체 무슨 영어공부를 더 시키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 언어가 얼마나 많은데 왜 ‘영어, 영어’만 외치지요? 미국만 봐도 50%는 스페인어를 쓸 거예요. 한국에선 영어보다 중국어, 일본어가 더 중요할 수 있어요. 단국대에선 학생들이 없다는 이유로 중동학과가 없어졌다죠? 넌센스예요. 대학은 슈퍼마켓 아니죠. 학생들이 먹고 싶은 곳만 파는 곳 아닙니다. 이렇게 교육이 획일적이면 창의력이 길러질 수 없죠. If you can’t think, you can’t do business. 그래서 한국 비즈니스도 약한 거예요.” =이렇게 문제가 많은 한국교육인데 한국 대학에서 오랫동안 제자들 가르치셨잖아요. 1994년엔 귀화하셨고요. 왜 이렇게 오래 한국에 계시게 되셨어요? “그래서 한국을 좋아해요. 문제가 많아서.(웃음) 서양 사람들은 보통 일본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난 싫어. 한국 사람들 고난 많았고 그 속에서 자기 부족한 것 보고 감사한 것 깨달았죠. 천상병 시인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했죠. 그의 삶을 보세요. 고문 당하고 힘없고 돈 없었지만 그 안에서 아이들의 천진함, 자연의 아름다움, 친구들의 사랑을 봤잖아요. 그게 바로 은총을 깨닫는 거예요.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 중요하지 않아요.” =교수님은 지금 다른 수사님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시잖아요. 앞으로도 쭉 한국에서 지금처럼 생활하실 예정이세요? “글쎄, 알 수 없죠. 난 수사니까 보내지는 곳으로 따라가야지. 하지만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인간의 고통 이해하려 노력하고 고통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나라죠. 이곳에서 사람들 이야기 듣고 이해하고 될 수 있으면 사람들 사랑하고 기도하고…지금처럼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아요.” 유지현 기자(prodigy@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