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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도 탐내는 한국 ‘전통꽃신’ 을 꿈꾸다

2010-03-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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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미에 화려한 현대 감각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혼

한국 신 글로벌 슈즈 첫발

마케팅ㆍ디자인 등 다각적 측면 미흡

풍부한 ‘스토리텔링’ 십분활용

‘마놀로 블라닉’ 같은 명품반열 기대




명품, 그 중에서도 구두에 대한 여성들의 애착은 남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집착 또는 애증에 가깝다.

미국의 인기 TV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 캐리는 극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방세 낼 돈은 없어도 500달러짜리 구두는 기필코 사야 돼!” 이런 신상녀를 보고 자란 ‘제2의 캐리’가 오늘 우리 곁에 무수히 많다.

패션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한다. 정장을 잘 갖춰 입은 날은 유난히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는 반면,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날에는 자세 또한 마구 흐트러진다. 이렇듯 여성들에게 하이힐이란 그 ‘갖춰 입음’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힐을 신으면 허리가 자연히 곧게 펴지면서 몸에 긴장감이 더해져 옷을 입었을 때 실루엣이 살아나면서 자신감을 북돋워준다.


하이힐은 우리나라의 전통 신발 ‘꽃신’과 묘하게 닮아 있다. 신으면 앞코 부분이 좁아 불편하지만 얄쌍하게 잘 빠져(?) 발이 예뻐 보이고, 외관이 화려하며 무늬가 다양한 것이 하이힐과 꽃신의 공통점이다. 많은 처녀, 혹은 아낙네들이 특별한 날에만 겨우 신어볼 수 있었던 곱게 수가 놓인 꽃신 한 켤레. 이렇듯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꽃신에 설레었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한 켤레에 수십만,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마놀로 블라닉, 크리스찬 루부탱 같은 외국산 명품구두에 열광하고 환호한다. 결국 명품구두 열풍에 우리의 전통 꽃신은 그냥 사라지는 걸까?

수년 전부터 한글을 자신의 패션 속에 차용해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의 실험에 이어, 한국을 대표할 문화 아이콘의 세계화를 타진해보는 대규모 이벤트가 개최돼 눈길을 끈다.

최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현대의 한국인이 정의하는 한국스타일을 말하다’는 부제 아래 막을 내린 ‘2009 한국스타일박람회’는 우리 전통문화의 여러 아이템들이 충분히 명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보여준 박람회였다. 3회째를 맞은 이번 박람회는 150여개 기업, 350여 부스로 구성됐으며 한글 한식 한복 한지 한옥 한국음악 총 6개 분야에서 다양한 전통제품들이 출품돼 ‘우리 것의 현대화’를 엿보게 했다.

’한국스타일의 산업화’에 있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데 목표를 둔 이번 박람회에서는 서양드레스 못지않게 세련되고 우아한 한복과 부드럽고 고급스런 한지가 특히 각광을 받았다. 출품작들을 마주한 관람객들은 “한복과 한지가 이렇게 뛰어나고 현대적인 줄 몰랐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세계 정상으로 뻗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바로 현대화한 전통 꽃신이었다. 전통 신발을 현대화하고 있는 한 업체의 ‘명장제화’였다.



명장제화는 한복에 어울리는 전통화를 포함해 꽃신을 현대화한 각종 정장화, 의료화, 승마부츠 등을 주문받아 제작하는 신발제조업체. 이 업체 김영만(77) 고문은 제화 분야에서 ‘대한민국 명장 1호’로 꼽히는 신발전문가. 김 고문은 “젊은 시절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을 돌며 제화기술을 익혀 50년 넘게 신발을 만들어왔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절 전용 수제화를 만들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요즘은 너무 서양 명품만 좋아하지만 우리 전통꽃신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편리하게 현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신발을 전담할 정도로 솜씨를 자랑했던 그가 오늘날 전통 꽃신의 현대화를 주창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김 고문의 뒤를 잇는 2세대 명장인 최덕수(57) 실장은 이를 보다 구체화하고 있다. 최 실장은 지금까지의 전통화가 인체공학적 구조가 아닌 것에 주목하고 한국인의 평균 발 모양과 크기에 맞춰 새로 개발한 전통 꽃신을 만들어냈다. 또 1세대가 주로 제조에 중점을 두었다면, 2세대는 설계와 최신 디자인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명장제화는 보건복지부에서 측정한 한국인 남녀 평균 발사이즈를 기준으로 신발을 제작하고 있는데 한국인의 발 모양 평균을 내 그대로 본뜬 라스트(일종의 ‘틀’)를 치수대로 여러 개씩 만들어 수제화를 설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남녀 라스트 모양이 서로 다른 데 ‘음양의 조화’에 맞춰 이를 설계한다는 점이다. 즉 남성의 라스트 모양은 끝이 둥글고, 여성의 라스트 모양은 발끝이 뾰족한 것이 곧 음양을 반영한 것.


최 명장은 “10년 전쯤 갖신을 만드는 한 장인에게 직접 음양의 조화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며 “그때 당시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랜 기간 제작을 해오면서 그 뜻을 마침내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디자인 연구파트의 강영민(30) 과장은 1년에 두 번씩 이탈리아에 가서 원자재 구입과 시장조사에 나선다. 강 과장은 “분명 한국 전통 신발에 대한 고급 수요는 존재한다”며 “한복은 요즘 들어 세계화를 위한 연구ㆍ개발이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전통 신발은 아직 미개척 분야다. 그래서 희소가치는 더 높다”고 전했다.

전통 꽃신은 1년에 몇 번 신을 일이 없지만 일단 ‘매우 특별한 날’에 신게 되는 만큼 고객들도 “이왕이면 제대로 된 것, 더 근사한 건 없느냐”고 찾는다고 한다.

사실 ‘꽃신’이란 말은 일제시대 이전에는 순우리말 ‘갖신’으로 불렸다. 가죽으로 만든 신이란 뜻에서 갖신이라 붙여진 말이다. 이런 우리나라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 또는 전문기술자를 화혜장(靴鞋匠), 우리말로는 ‘갖바치’라 불렀다.

가죽신은 일제강점기 이후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한때 서민들의 수요가 급증하기도 했지만 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구두를 비롯해 서양식 신발이 주류를 이루면서 갖바치의 명맥이 거의 끊겼다. 조선의 마지막 왕실 갖바치를 지낸 황한갑 옹이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화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지금은 그의 손자인 황해봉이 이어받았다. 황해봉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37호로, 1999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조부(祖父)는 고종황제의 신발을 손수 만들었으며, 손자인 황해봉 무형문화재는 육영수 여사가 그의 고객이었다. 황 장인은 본드 대신 밥풀을 짓이겨 접착제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그의 작업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의 친환경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전통 꽃신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수십 번의 제작 공정을 거쳐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를 바탕으로 완성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인 및 신과 관련된 각종 문헌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당시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현대적인 감각과 기능에 맞춰 개발돼 발도 편하고 멋스러워진 우리 ‘전통 신’이 이탈리아 명품 ‘토즈’의 드라이빙 슈즈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력뿐 아니라 디자인이 더욱 강화돼야겠다.

아울러 마케팅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도 개혁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선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잠재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풍부한 스토리.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우리의 흥미롭고 따뜻한 이야기가 제품 안에 자연스럽고 은근하게 녹아들 때 고객들은 더욱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상품에 화젯거리를 불어넣기 때문에 관심과 구매가 확대될 것.

누룽지같이 우러날수록 구수하고, 그 맛이 은근한 우리네 고전과 설화를 바탕으로 우리의 잊혀졌던 꽃신을 현대화하는 일은 장인들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무조건 ‘캐리’를 닮으려 하기 보다 나만의 멋, 우리만의 멋을 오롯이 돋보이게 하는 일, 그것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오영경ㆍ김하정 대학생인턴기자(amourkyung@naver.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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