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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을 다시 본다>소 판 종잣돈이 글로벌기업으로…경제巨木 ‘신화’로 부활
그의 기업가 정신
가난 탈출위해 가출 서울로

22세에 어엿한 쌀가게 주인


경부·영동고속도 건설

한국경제의 대동맥 구축

조선·자동차·전자 등

끊임없는 도전정신의 화신


21세기를 정의하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정곡을 찌르는 말이 있다. ‘위인’이 사라지고, ‘신화’가 사라졌다는 것. 오는 21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으면서 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신화가 사라진 21세기 초반 신화가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한 마디로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산업을 일구고 국가경제를 일으킨 거장이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산골에서 아버지 몰래 소를 팔아 마련한 70원을 품에 안고 집을 떠나 누구도 쉽사리 넘보지 못할 글로벌 기업을 일군 대한민국 산업계의 거목이 ‘정주영’이라는 데 대해 이견이 없다.

정 명예회장이 돋보이는 부분은 ‘기업가정신’이 사라진 현 시대에 진정한 ‘기업가정신’의 본보기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기업을 일군 사업가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만족을 선택한 반면, 그는 지금보다 미래를 내다보며 조선ㆍ자동차ㆍ중공업ㆍ철강 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를 했다. 

고 정주영 회장은 두 차례의 소떼 방북을 통해 남북 경협의 물꼬를 트고 남북 정상회담의 가교를 놓는 등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사후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고 지금까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 결과 정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 현대자동차그룹은 꿈의 목표였던 세계 10위를 까마득하게 멀리한 채 글로벌 빅3를 내다보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 역시 세계 최고 조선ㆍ중공업 자리를 꿰찬 이후 단 한 번도 수위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 정상가도를 달리고 있다. 타계한 지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상상했던 일이 차례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정 명예회장도 출발도 남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씨 사이에서 6남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 명예회장은 부모와 줄줄이 태어난 동생을 위해 공부보다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모두가 그랬듯이 풍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같은 척박한 삶이 그를 ‘가출’의 길로 이끌었고, 노력하는 모습 덕택에 22세에 어엿한 쌀가게 주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일제의 전시체제령 탓에 정 명예회장을 사업가의 길로 이끈 쌀가게 ‘경일상회’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가진 사업가정신이 오늘을 일궈냈다.

경일상회가 문을 닫은 후 정 명예회장은 자동차 정비업체인 아도서비스를 경영했고,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명실상부한 사업가가 됐다. 이어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사를 세워 미군 숙소를 짓고,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를 짓는 등 국내외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 반열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현대건설을 국내 1위 건설사로 이끌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를 세울 당시 야전침대를 놓고 현장에서 직원을 독려한 것은 아직도 현장경영의 표본으로 입에 오르내린다.

이후 그는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조선사업에 뛰어들면서 믿었던 일본 미쓰비시상사 차관 조달에 실패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우여곡절 끝에 자금을 조달했고, 조선소를 짓는 도중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로부터 26만t 규모의 선박 2척을 수주하는 등 기적을 일궈냈다.

오늘날 세계 4위에 오른 자동차사업도 경영자로서 정 명예회장의 뚝심이 아니었다면 시작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66년 자동차 산업에 진출해 1975년 대한민국 최초의 순수 국산차 ‘포니’를 만들면서 토대를 닦았다. 1986년에는 모두가 무모하다고 믿은 미국에 엑셀을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25년이 지난 지금 현대차는 미국에서만 600만대 이상 자동차를 팔았고, 외환위기 당시 인수한 기아차까지 합치면 1000만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고 소떼를 앞세워 50년 가까이 닫혀 있던 북한의 문을 두드린 것도 정주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영광 뒤에 가려진 어려움과 함께 2001년 3월 21일 86세로 일기를 마감하면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 그가 2011년 3월, 몸을 사리기에 바쁜 국내 기업인에게 “깨어나라”는 고함과 함께 진정한 ‘신화’로 부활하고 있다.

이충희 기자/hamle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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