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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무 살’ 성폭력상담소 “제도 보단 성폭력 바라보는 사회인식 변해야”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찾았다. 주소를 따라 몇개의 골목길을 지나 상담소에 도착했다.하지만 어디에도 이 곳이 상담소임을 알리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KSVRC’라는 글자가 쓰인 작은 원형 표지판만이 눈에 띄었다. 이유가 있었다. ‘KSVRC’는 한국성폭력상담소(Korea Sexual Violenve Relief Cnter)의 약자. 상담소를 찾는 피상담자들이 혹여나 타인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을 겪지 않기 위한 상담소의 배려였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많이 변화했지만 아직까지도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좋진 않죠. 상담소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영문약자 표기도 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했다.

그래도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젠 ‘성폭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죠.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누구나 다 사용하잖아요. 예전에는 성폭력이라는 말을 입에도 못올렸어요.” 이 소장은 한가지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1990년대 초 은행에 방문한 성폭력상담소 직원이 한참을 지나도록 은행업무를 보지 못했다. 화가난 직원이 은행원에게 따져묻자 ‘성폭력상담소라는 말을 마이크에 대고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은행이 번호표를 주는 대신 고객 이름을 일일히 불렀는데 예금주명에 적혀있는 ‘성폭력’이란 단어를 말하지 못했던 것. 심리적인 벽이 그만큼 높았던 셈이다.

▶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지난 20년 = 20년 간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성폭력 범죄에 대한 개념이 대중화됐고, 그에 대한 경각심도 높아졌다. 오는 4월13일 스무살 생일을 맞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러한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결실도 많다. 1993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또한 성폭력이 비면식범에 의한 강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가족, 연인, 친구, 상사, 동료 등 면식이 있는 지인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추행도 모두 포함한다는 개념을 알리는데도 앞장서왔다. 이 소장은 “성폭력이 명백한 범죄이고 처벌해야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생겼어요.큰 보람입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1991년 개소하기 이전엔 국내에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한 전문 상담기관이 전무하다시피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로 상담을 필요로하는지 통계를 내는 기관도 없었다. 상담소는 매년 상담통계와 분석자료를 발표해왔다. 1993년 성폭력특별법이 만들어진 것도 통계를 근거로 정부에 법과 제도의 필요성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에 발생했던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지난 20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수가 조교를 성희롱한 사건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 제기된 일이었다. 6년 간의 법적 투쟁끝에 교수에게 500만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피해자를 지원하며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고 주장한 곳이 바로 한국성폭력상담소였다. “그 사건 이후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처벌규정이 만들어졌어요. 성범죄의 개념을 확대한 중요한 계기였죠” 


▶“제도 보단 성폭력 바라보는 사회 인식 변해야”= 하지만 지난 20년, 기쁨만큼 아쉬움도 큰 시간이었다. 성폭력 방지를 위한 각종 법과 제도가 마련됐지만 그 효과는 미밓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은 20년 전과 매한가지다.

이 소장은 “최근 몇년간 아동성범죄사건이 여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수많은 관련 제도와 법안을 쏟아졌죠. 하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에요. 지속적인 모니터링 없이 법안만 제기하는 것은 여론을 의식한 ‘생색내기 용’에 불과하죠”라고 비판했다.

성범죄 등 흉악범의 유기징역 상한을 최대 50년까지 상향시키는 등 가해자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은 이미 시행이 되고 있지만 현실에선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이 상담소의 주장이다.

상담소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의 신고율은 6~7%. 이 중 기소율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5년 이상의 중형을 받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그는 “성범죄 가해자 100명 중 90명 이상이 아무런 제약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해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성범죄 관련 법을 운용하는 수사 및 사법기관의 인식도 아직 부족하다. 이 때문에 수사ㆍ재판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2차 피해도 크다.

이 소장은 “수사관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 지에 따라 사건 처리가 달라지는 경우를 종종 봐요. 성인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는 처음부터 ‘당신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질문을 하기도 하죠. 실제로 성폭행을 당한 딸과 법정 소송에까지 나섰던 한 어머니는 ‘누군가 소송을 한다고 하면 절대 말리겠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상담소가 2007년부터 한해동안 대법원판례바꾸기 운동을 진행했던 이유도 연장선상에 있다. “폭행이 동반돼어야 강간이 인정된다고 하는데 그 폭행을 어떻게 증명하라는 걸까요. 소리를 안지르고 반항을 하지 않았으면 강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경우도 있었어요. 법이 정해놓은 양형이 놓으면 뭐하나요. 판사들의 성범죄를 접근하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처벌을 강화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 소장은 강하게 말했다.

▶정책 틀 만들기 보단 상세한 모니터링 필요할 때 = 법이나 제도도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20년 전에 비하면 많은 발전을 이뤄온 것은 사실이다. 이 소장은 “이젠 틀 만들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 진 법과 제도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도록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와 사회가 더욱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신고율이 높아지고 처벌도 할 수 있죠.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으려면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변해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도 마치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제도와 사회적인식의 괴리가 좁혀지는게 중요합니다” 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ssujin84>
sjp1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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