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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정신병동에서 쓴 최승자의 시
“꿈인지 생시인지/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내 이름은 짧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오 명목이여 명목이여/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물 위에 씌어진3)

지난해 10여년간의 공백을 깨고 ‘쓸쓸해서 머나먼’이란 작품으로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한 최승자 시인이 1년 만에 시집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학)을 냈다. 시의 봇물이 터졌다.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 전부를 정신과 병동에서 썼다고 ‘시인의 말’에서 밝혔다. 정신질환으로 10여년 동안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한 시인은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밥도 잊고, 때도 잊고, 혼잣말도 하는 혼돈 속에 있었다. 그런 속에서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시였다. 

이번 시집에는 흔들리는 자아와 세계, 그 아득함 속에서도 의식의 끈을 놓치 않으려는 부릅뜸이 있다. ‘오른발을 東에 두고 왼발은 西에 두고’ 굽어보지만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무의식끼리의 싸움과 메마른 생각으로 허허롭게 배회한다. 그가 발견한 건 어느 쪽도 아닌 ‘무(無)’와 ‘허(虛)’의 세계.

“21세기에도 허공은 있다/바라볼 하늘이 있다//지극한 無로서의 虛를 위하여”(하늘 도서관)

“소보록 소보록 쌓여가는 눈이 고맙다/단순한 이 한 풍경이 이렇게 즐거울까/즐거우니 너네들이 부처다/즐거우니 너네들이 그리스도다”(눈내리는 날)

시인은 노자, 장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세상은 시인에게 장자식으론 없음으로써 있는 그림 떡일 뿐이고, 플라톤적으로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 바라보는 꽃도 어제 생겨난 듯하지만 천만년 전의 꽃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가슴을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듯하다. 세상은 먼 풍경일 뿐이다.

‘물 위에 씌어진 시’들은 그 자체로 존재의 무의미성을 내포하지만 역으로 적극적 시행위로도 읽힌다. 물이 지닌 죽음과 무에 함몰되지 않은 시행위 속에 시인의 실존이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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