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투병 중인 이충렬 감독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낯빛엔 허망함과 자괴감, 세상에 대한 울분이 뒤섞여 있었다. “지난 2년간 스트레스와 울화병으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이 감독의 일산 집엔 수십개의 약봉지가 흩어져 있었다. 지난 6월 안면마비와 어지럼증으로 쓰러져 닷새간 일어나지 못하다가 뇌종양 판정을 받은 지 한달여. 이 감독은 이후 휴대폰 번호도 바꾸고 두문불출하며 외부와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안면마비 증세는 호전됐지만 시력 장애와 거동은 여전히 불편해 집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생활한다. 곧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워낭소리’가 국민들께 감동과 즐거움을 줬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너무 잘 돼서 모두가 쓸데없는 욕심이 생기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와 지인에게 돈 다 뺏기고…. 지금 집도 월세에요. 정말로 원치 않게 봉화군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삶을 건드려서 피해를 줬고 그들의 자식들에겐 불효자 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가 평생 지고 갈 짐이죠. ”
이충렬감독, 고영재PD. 이상섭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09.01.02 |
돌이켜보면 ‘워낭소리’의 기적은 쇠락한 고향의 산하와 아버지의 삶을 다루고 싶다는 열망에서 출발해 10여년간 자신의 영혼을 다바쳐 이룬 결과였다. 이 감독에겐 영화 속 할아버지처럼 전남 영암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을 뒷바라지 한 아버지가 있다. 독립 방송 PD로서 한번도 자랑스러운 아들인 적이 없던 이 감독. ‘워낭소리’로 성공이 뒤늦게 찾아왔지만, 환희는 신기루처럼 짧았다.
자신을 무너뜨린 세상에 대한 울분은 한때 “형, 동생” 하며 돈독했던 제작자 스튜디오 느림보의 고영재 대표에게 집중돼 있었다. 이 감독은 지난 5월 제기한 ‘정산금 청구 소장’에서 고대표가 자신을 공동제작자로서 예우하지 않았고 정산금 중 일부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고 대표가 2009년 2월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전체수익 중 30%를 독립영화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고 대표의 입장은 달랐다. “영화 제작 및 배급에 필요한 각종 비용과 영화 주인공에게 약속한 보상을 제외한 극장수익에 대해선 이미 이 감독과 50대 50으로 나누었다”는 것이 고 대표의 반박이다. 그는 “독립영화 30% 기부약속은 지켜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대표와 이 감독은 영화 흥행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와 독립영화 ‘혜화, 동’ 등 영화계에 각자 이름으로 3억원 이상씩을 기부ㆍ후원했다.
‘워낭소리’ 극장상영의 총수익은 과세 전 기준으로 76억원(각종 비용 산출 전 금액)규모로 추산된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