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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말하는 세종…사극 ‘뿌리’를 흔들다
‘뿌리 깊은 나무’ 파격 설정 통해 살펴본 임금 캐릭터 변천사

“우라질” “빌어먹을” “ 젠장”…

체면 버리고 비속어 남발

‘이산’ 정조의 다정다감

‘동이’ 숙 종 CEO 이미지 과시

기존 틀 깬 퓨전사극 눈길



“우라질” “빌어먹을” “젠장”

‘조폭’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욕지거리가 브라운관을 타고 흐른다. 저잣거리 낭인인가 싶었는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다. SBS 수목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이하 뿌리)’에서 한석규가 보여주는 새로운 임금 캐릭터, ‘이도’에 시청자들은 즐겁다. 욕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다혈질 이도는 성질이 나면 집히는 대로 마구 던지기도 잘한다.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성과가 덧씌운 판타지 탓에, 광화문 한복판의 그 가늠조차 어렵던 무게감은 온데간데없다. 왕이 오셨다. 그것도 아주 낮은 곳으로.

#왕 캐릭터 변신, 사극 변모의 최정점=한석규가 연기하는 이도는 지금껏 어느 사극에서도 볼 수 없던 독특한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것에는 사극 자체의 변모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와 KBS ‘대하사극’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궁중사극은 왕위 찬탈 등 궁궐 안의 권력투쟁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왕의 성격이란 늘 대중이 이미 인식하는 범위 내에 있었다. 응당 그래야 할 성격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거나, 그 권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추측가능한 인간적 고뇌를 표현해내는 데 그쳤다. 역대 사극 최다 주인공인 장희빈과 함께 등장하는 숙종 역시 ‘인현왕후’ 와 ‘장희빈’을 통해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졌다. 

정통 사극에서 벗어나 현대극의 특징을 살린 퓨전 사극이 대세가 되면서 최근 사극은 파격적인 왕의 언행으로 주목도를 높이는 추세다. 사진은 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
(한석규 분)가 자신의 분신인 젊은 이도(송중기 분)와 멱살을 잡으며 고뇌하는 모습.

탤런트 전광렬을 톱스타 반열에 올린 MBC ‘허준’은 시청률이 60%까지 오른 90년대 최고 인기 사극이다. 이때는 사극 속 왕 캐릭터가 수면 위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변신을 준비한 기간이다. 80년대 왕 중심 사건전개에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왕과 신하의 권력다툼, 왕비와 후궁들의 시기ㆍ질투ㆍ암투 등을 전면에 내세우던 궁정사극에서 탈피해 극 전개의 핵심에 상인, 한의사 등 새로운 인물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MBC ‘다모’ 를 통해 시작된 퓨전사극 열풍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며 2000년대 전반을 휩쓸었다. 퓨전사극의 특징은 무엇보다 현대극을 보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다. 따라서 출연진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연령대 역시 함께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모’를 기점으로 점점 커진 여성 주인공의 비율은 ‘여인천하’ ‘대장금’ ‘선덕여왕’으로 이어졌다. ‘선덕여왕’의 ‘미실’ 캐릭터는 사극이 이제 사건전개만큼이나 입체적인 인물 성격의 부각에 공을 들인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줬다.           

#정말 그랬을까? 매력적인 임금님=개성 넘치는 인물의 부각은 명품조연으로 대변되는 부수적 인물들을 뜨고 지게 하는 가운데, 가장 상단부의 ‘왕’으로 조심스레 향했다. 놀라운 것은 역사상, 혹은 이야기 전개상 일삼는 행동이 아닌, 왕의 성격 그 자체가 파격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지 않았을까?’가 아닌, ‘이건 어때?’ 하는 방향전환이다.

퓨전사극의 열풍을 타고 ‘다모’의 주인공이었던 이서진이 다시 MBC ‘이산’을 통해 감정 풍부한 정조를 연기했다. 최근 인기몰이인 한석규의 ‘이도’에 비하면 더없이 점잖은 왕이지만, 임금으로서의 위엄보단 사랑과 우정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드러내는 왕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지극히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인간 정조였던 셈. 

‘동이’ 숙종<왼쪽>, ‘이산’ 정조.

장희빈과 더불어 사극 최다 출연자는 숙종. 선하다 못해 유약하게 그려졌던 숙종은 ‘동이’의 지진희를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유머러스하고 다정다감한 지진희표 임금님을 통해 사극 속 왕의 캐릭터는 확실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특징인 현대어 구사는 젊고 세련된 CEO 혹은 현대 대통령을 연상케 했고, 동이와의 로맨스는 근엄한 왕이기보다는 섬세하고 바람기 가득한 남성으로 비쳐졌다.

SBS ‘뿌리’에서 한석규가 보여주는 세종, ‘이도’ 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음모와 대립을 미스터리 살인사건과 엮은 이 드라마 속 세종은 지금껏 시청자들이 만난 가장 파격적인 왕이다.

드라마 평론가 윤석진(충남대 국문과 교수) 씨는 “사극의 변모와 함께 민초들의 삶 등 나올 만한 이야기는 다 나왔기 때문에, 이제 한계치에 도달한 소재가 ‘왕’의 묘사에 다시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절대왕권이 아닌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가능했을 법한 세종의 고뇌 등을 파격적으로 그린 것에 시청자들은 놀라면서도 연민을 가진다”고 평했다. 

박동미 기자/pd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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